인공지능(AI) 산업의 경쟁 축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거대언어모델(LLM)의 성능과 알고리즘 혁신이 경쟁력을 좌우했다면, 이제는 AI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확장할 수 있는지가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컴퓨팅 파워(算力)'와 이를 뒷받침하는 금융이 있다.
최근 중국 AI 기업 판스(范式, ModelBest)와 상하이푸둥발전은행(浦发银行·SPD Bank)이 장기 전략적 협력 협약을 체결하고, 30억 위안 규모의 의향성 금융 지원을 추진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번 협약은 단순한 기업 대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양측은 AI 컴퓨팅 인프라 구축, 이기종(異種)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저층 컴퓨팅 아키텍처 개발 등을 공동 추진하기로 했으며, 향후 공급망 금융과 투자은행(IB), 국제금융 등으로 협력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융이 AI 기업의 성장 자금을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산업 생태계 조성의 한 축으로 참여하는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생성형 AI 시장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경쟁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우수한 AI 모델을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시장 우위를 확보하기 어렵다. 대규모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컴퓨팅 자원과 이를 지속적으로 확충할 수 있는 자본 조달 능력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고 있다. 판스 역시 이번 금융 지원을 이기종 칩 클러스터 구축과 AI 컴퓨팅 인프라 확대, 핵심 플랫폼인 HAMi와 ModelHub, API 및 에이전틱 AI(Agentic AI) 사업 고도화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AI 산업이 연구개발 중심에서 산업 인프라 구축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사례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부분은 금융기관의 역할이다. 중국은 AI를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면서 지방정부, 국유기업, 산업펀드, 정책금융, 상업은행이 각각 역할을 분담하는 구조를 확대해 왔다. 이번 협약 역시 기술기업과 금융기관이 공동으로 '컴퓨팅 산업 금융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정책 기조와 맞닿아 있다.
특히 공급망 금융을 AI 인프라 기업까지 확대하겠다는 구상은 GPU 공급기업, 데이터센터 운영사, 서버 제조기업,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 등 AI 가치사슬 전반으로 금융 지원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AI를 단일 산업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구성하는 기반 산업으로 바라보는 중국식 접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이 주목해야 할 변화
한국에서도 AI 투자 확대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 논의는 여전히 AI 모델 개발과 서비스 육성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중국에서는 컴퓨팅 인프라, 전력, 데이터센터, 반도체 공급망, 금융까지 하나의 산업 체계로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AI 산업의 성장 과정에서 금융이 단순한 자금 공급자가 아니라 산업 확장의 공동 설계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물론 이번 협약에서 발표된 30억 위안은 '의향성 금융 지원'으로, 실제 집행 규모와 방식은 향후 사업 진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금융기관이 AI 컴퓨팅 인프라를 장기 투자 대상으로 판단했다는 사실 자체는 중국 AI 산업이 새로운 성장 단계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볼 수 있다.
AI 산업의 경쟁은 더 이상 알고리즘만의 경쟁이 아니다. 누가 더 많은 컴퓨팅 자원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며, 이를 장기적으로 뒷받침할 금융 시스템을 갖추느냐가 새로운 승부처가 되고 있다.
판스와 푸파은행의 협력은 중국 AI 산업이 '기술 중심 경쟁'에서 '산업 생태계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앞으로 글로벌 AI 패권 경쟁은 모델의 성능뿐 아니라 금융과 산업, 인프라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는가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이다.
윤교원 대표 / The K Media & Commerce, kyowe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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